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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밤빛(이채현 시집)

십자가 아래에서 당신을 그리며 새처럼 조잘대는 기도


삶의 여정(旅程)에서 왜 이리 허기지나, 왜 이리 갈증이 심하나. 헐떡이며 찾아 헤매는 시인은 존재의 온 촉각의 깨어 있음으로 자아와 타자와 세계와 자연을 응시한다. 그리고 그 근원(根源)을 하느님께 둔다. 저 고귀한 것. 저 위대한 것. 저 존엄한 것.

어둔 밤, 어이 아시고 사랑으로 오시어 마구간 구유에서 십자가까지 빛 되어 이끄시는 저 높은 곳. 저 깊은 곳. 저 너른 곳. 보이지 않아 볼 수 없고, 들리지 않아 들을 수 없는 당신이기에 우리는 밤길을 걸어가듯 길을 잘못 들 때도 있고, 제자리를 맴돌 때도 있으나 어느 순간, 깊은 심중에서 울려오는 아, 깊은 사랑이었구나. 

십자가 아래에서 당신을 그리며 새처럼 조잘대는 기도. 시인은 사랑으로 이 마음을 고백한다. 흰색, 검정,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수많은 다채로운 사랑을 담는다. 이를 한 땀 한 땀 오색실로 꿰어 조금 더 삶을 성찰하는 사람, 조금 더 기도하는 사람, 조금 더 사랑 많이 하는 사람, 조금 더 함께 하는 사람으로 꽃 피기를 시인은 희구한다. 영근 시어(詩語)는 살아 밤하늘에 박힌다. 빛난다. 밤을 여는 환희의 새벽이 다가온다. 푸른 우리가 된다.

“지금, 햇살이 비춰요, 햇살을 안아요. 지금, 꽃이 피어요, 꽃을 맞아요. 지금, 바람이 불어요, 바람을 감아요. 지금, 비가 뿌려요, 비를 먹어요. 지금, 밤이 덮어요, 밤을 개켜요. 지금, 별이 열려요, 별을 꿰어요. 오색 빛, 당신.”




■ 책 속으로 ■


‘진정한 명품이란 무엇일까?’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소중한 ‘명품’은 ‘사람 자체’가 아닐까? 나와 타인과 주변을 사랑하는 마음, 아파하고 고통 받는 이와 함께 하려는 심성, 가진 것이 부족할지라도 나누려는 넉넉한 생각, 최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자세, 자연과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돌봐주는 애정, 바르고 곧은 품성, 겸손과 온화함으로 섬기는 종교적 심성…

이러한 성품으로 가꿔가는 이들은 이를 바탕으로 늘 자신을 성찰하고 이웃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자신과 주변을 명품으로 조각해가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비어 있어도 충만하고 모자라도 넘치는 삶을 살아간다. 오늘도 맑은 눈을 뜨고 경쾌한 발걸음을 디디며 나 ‘자신’이 ‘명품’이 되어 보려고 노력하는 데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난다.

―<명품정신> 전문



며칠간 아팠습니다. 열이 나고 기침을 하고 콧물이 흐르고 침도 삼키지 못하고.

그런데 이 때, 건강할 때의 허영이 사라졌습니다. 삶이 무엇이냐며 빈방에서 하루 종일 푸념하던 사치를 하지 않았습니다. 머리로만 의미를 부여하려던 객기도 꺾였습니다. 사랑이 덩그렇게 곁에 숙제로 남았습니다. 어느 정도 추스르고 일어난 지금, 여전히 내가 불쑥불쑥 튀어나오고 그다지 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조금 더 기도하며 살겠습니다. 생명의 샘. 꽃샘추위가 참 매서웠습니다.

―<꽃샘추위> 전문



■ 추천사 ■


‘사랑’을 노래하던 이채현(스텔라) 시인이 이번에 뜻밖의 이미지를 들고 왔다. ‘밤’이다. 

그 ‘밤’은 인고의 시간이면서도 정화의 시간이다. 어두컴컴한, 칠흑 같은 어둠이 아니라 여명의 기운이 움터오는, ‘밤빛’이 서려오는 시간이다. 투명하고 맑은 시어들이 어스름한 밤빛을 받아 정화의 길로 들어선다. 

시인은 지난해 <사랑한다면>(2014)을 통해 나무・달・이웃 등 다양한 관계 안에 담긴 하느님의 마음을 읽어낸 바 있다. 나와 이웃을 비롯한 모든 살아 있는 생명들을 품어주라는 그분의 뜻을 옮기기 위해서다.

이제는 나약한 인간의 관점으로 솔직하게 돌아왔다. ‘당신과 결코 같아질 수 없는 운명’,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비극의 굴레로 옮겨왔다. 지칠 줄 모르는 임 향한 사랑이 그를 충동질한다. 그가 헐떡이며 찾고 있는 사랑의 대상이 무엇인지, 혹은 누구인지를.

일상에서 접하는 모든 이미지들이 기도이자 시의 소재가 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들려오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 시인은 쉴 새 없이 그것이 무엇이고 그분이 누구인지를 찾아 헤맨다. 오랜 기다림인 만큼 성급하게 결론짓거나 판단하지 않는다. 밤 속에서 오랫동안 곱씹는다(‘밤빛’). 그래서인지 이번 시들은 수도자들이 하루의 끝에 봉헌하는 양심성찰(良心省察)과 궤를 같이 한다. 


이채현 시인과 나의 관계는 기고자와 기자의 관계에서 시작됐다. 나는 이채현 시인의 시를 우연찮게 접했고, 시의 면면에 흐르던 사랑의 맑은 기운에 감동했다. 당시 가톨릭신문 출판면을 담당하고 있던 터라 즉시 시인의 시집을 신간으로 소개했다. 이어 시인에게 연락해 ‘일요한담’이라는 부분에 기고를 청했다. 시인은 산문이라는 ‘낯선’ 문체에 도전하는 게 부담이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내가 고집을 부려 기어이 시작하고야 말았다. 

기고하면서 시인은 자주 “무엇이 ‘가톨릭’스러운 것인지”에 대해 깊이 있는 질문을 던졌다. 또, 다양한 인문학적 주제들이 교회적 맥락에서 어떻게 다양한 의미를 갖는지 묻고 탐구했다. 그 집념이 대단해서 감탄할 정도였다. 창작열이 샘솟는 이유를 알 듯 했다. 실제로 이채현 시인은 세상이라는 하얀 캔버스에 갖가지 이미지로 마구마구 그림을 그려냈다. 시나 글을 잘 쓰기 위해선 다작(多作)이 필요조건일진대, 시인의 성장 가능성은 무서울 정도였다. 이번 시집에는 그런 치열한 사유의 흔적들이 곳곳에 녹아 있다. 


이번 시들은 희망의 여명이 동터오는 이미지로 가득하다. 십자가에 못 박은 손이 나의 손이라는 뼈아픈 반성(‘십자가’)과 눈물과 죽음의 경계에서 본 그리움의 아버지(‘서럽던 어느 날’) 등은 비극을 겪는 데만 머물지 않고 새로운 문제를 설정하도록 나아간다. 아울러 세상의 이치란 그렇고 그런 것이라는 절망과 체념에만 머물지 않고, 새로운 창안의 문제로 승화시킨다(‘세상아’). 희망이 가질 수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무엇을 하게끔 만드는 큰 용기의 발원지(發源地)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새로운 어둠, 밤 속으로 걸어 들어가 그 혼돈 속에서 무력한 사유와 시에 작별을 고하고 새로운 사유와 시를 창안하려고 한다. 근저에서부터 물음을 던지며 새롭게 문제를 설정하고자 하는 것은 절망과 비극을 그대로 버려둘 수 없다는 최소한의 윤리가 시인을 가만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이다.  

눈물과 애도, 우울의 시간이 넘실거린다. 동시에 다른 무언가가 필요한 시간이 오고 있다. 슬픔과 한탄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도래하고 있다. 그 새벽빛이 어스름하게 비춰진다. ‘밤빛’이 드리운다. 


‘밤빛’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마음 속 깊은 데서부터 응원을 보낸다. 

태양 솟을 다음 시간이 벌써부터 기대된다면 사치일까.


김근영 드림

前 가톨릭신문사 취재기자

現 로사사회봉사회 법인사무국



■ 지은이 ■ 이채현


1964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나, 1988년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1993년 이화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학과를 졸업했다. 현재는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으로 <그대에게 그런 나였으면>, <하늘에서 꽃이 내리다>, <사랑한다면>이 있다.



■ 도서명: 밤빛

■ 지은이: 이채현

■ 펴낸곳: 작가와비평

■ 46판(128×188)|148쪽|값 10,000원

■ 발행일: 2016년 01월 20일

■ ISBN: 979-11-5592-170-8 03810

■ 분야: 문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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