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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논쟁> 공지영의 『의자놀이』 발간과 뜨거웠던 논란들(2)

<문화 논쟁> 공지영의 『의자놀이』 발간과 뜨거웠던 논란들(2)

               - 전성욱의 글을 비판한다




                   『의자놀이』의 중독성과 1인칭 ‘나’


   공지영의 『의자놀이』는 불과 반년만에 기획되어 초스피드로 출간된 르뽀이다. 공지영은 왜 이렇게 빨리 출간하게 되었을까? 이것은 쌍용자동차 사건으로 인한 노동자의 절망이 자살의 대행진으로 이어지는 다급한 상황을 막기 위한 비상 조치였다. 하지만 초스피드의 발간은 작가 공지영에게 날림과 부실 공사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 공지영은 르뽀가 아니라 소설이 자신의 전공이다. 르뽀는 글쓰기라는 점에서 공통적이지만 허구를 다루는 소설과 사실을 기록하는 르뽀는 많은 차이가 존재한다. 이 차이를 불과 반년만에 극복할 수 있었다면 이 땅의 르뽀작가는 아마도 자신의 무능력을 탓하며 절망했을 것이다. 공지영은 다행하게도 르뽀작가의 수준이 아니라 소설가로서 르뽀에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을 보여주었다.


   르뽀작가 이선옥은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공지영의 『의자놀이』가 르뽀 문학의 측면에서 미흡한 점을 여러 부분 지적하고 있다. 이선옥만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평자들도 『의자놀이』의 르뽀적 완결성이 미흡하다는 점을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르뽀작가도 아닌 공지영이 갑자기 르뽀를 쓰게 되었을까? 르뽀작가가 이 책을 쓰면 더 잘 쓰겠지만 지명도가 떨어져서 많은 사람들이 읽지 않기 때문이다. 유명작가인 공지영이 쓴다면 르뽀문학으로서는 미흡하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쌍용자동차와 관련한 이야기들을 좀더 많이 읽고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점 때문에 공지영은 진보 진영에서 일종에 차출이 되어 이 책을 쓰게 된 것이다. 공지영은 자신의 첫 르뽀가 조영래의 『전태일 평전』(1983)과 같은 반열에 오르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그녀의 희망 사항은 말 그대로 희망 사항에 그쳤다.


   문학평론가 손종업은 「도가니에서 살아남기」(《교수신문》, 2012.9.3.)에서 “이 책은 깊고 신중하게 파고들지도 않는다. ‘보이지 않는 어떤 구조’는 다만 암시될 뿐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작가는 우리 사회의 침묵하는 중산층들에게 다가설 수 있지 않았을까.”라고 반문한다. 문학평론가 신형철도 「문학과 비문학 사이의 르포」(《한겨레 21》, 2012.9.10)에서 『의자놀이』 의 미흡함을 지적하면서도 긍정적으로 텍스트를 바라본다. “저자는 자신의 무지를 솔직히 고백하고, 인용에 기꺼이 의지하며, 이해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 진솔하게 아연해하고, 혹자들은 감상적이라고 할 만한 문장들을 쓴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런 단점들이 오히려 이 책의 장점이 되고 있기도 하다는 사실이다.”두 평론가는 『의자놀이』가 미흡하지만 당대 절박한 현실에 분노하고 이것을 시정하려고 노력한 공지영의 노력을 인정하고 있다. 많은 독자들은 공지영의 『의자놀이』를 읽으면서 르뽀작가와 동일한 수준 내지 그 이상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다. 공지영의 눈을 통해 본 쌍용자동차의 진실을 듣고 싶었을 뿐이다. 

   공지영은 주체 의식이 아주 강한 작가 중의 하나이다. 공지영의 문학은 세상과 쉽게 타협하지 않는 주체의 공주병이 만들어낸 계몽적 비판과 감상이 핵심이다. 공지영의 도도한 주체 의식은 1990년대는 후일담의 운동권문학과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페미니즘 문학을 등장시킨 원동력이었다. 물론 이런 도도한 주체의식은 많은 반향을 일으키지만 반대편에서는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 비토 세력을 만들기도 했다. 그녀의 주체의식은 2000년대 들어 타자를 발견하고 더불어 공존하는 세계를 지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지영의 글쓰기는 주체의 목소리가 여전히 강하다. 『의자놀이』 에서 공지영은 주체를 대변하는 1인칭 주어인 ‘나’를 수시로 등장시키고 있다. 공지영은 이 책에서 쌍용자동차 노동자와 1:1의 관계 속에서 쌍용자동차의 진실을 발견하고 슬퍼하고 분노하고, 독자에게 도와달라는 주체의 목소리를 낸다. 

   일반적으로 르뽀작가는 자신을 내세우기보다 타자인 현장의 목소리를 좀더 전달하고자 한다. 이 점에 비추어 『의자놀이』는 현장문학인 르뽀의 형식을 제대로 보여주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공지영을 대변하는 1인칭 ‘나’는 처음에 쌍용자동차의 진실을 피상적으로만 알았다가 조사를 하면서 심층적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면서 1인칭 ‘나’는 쌍용자동차 관련 모임에서 어색했던 ‘나’에서 벗어나 그들과 동화하는 법도 터득한다. 이러한 ‘1인칭의 나’는 쌍용자동차 문제에 부딪쳐 뜨거운 눈물과 분노를 표출하는 신파적 감상성의 공지영이다. 독자들은 텍스트를 읽으면서 이러한 공지영과 한몸이 된다. 쌍용자동차와 관련한 이성적 사고와 구조적 분석은 주로 인용되는 글이 담당하고 있다. 이것은 『의자놀이』 에서 보여주는 인식과 사실이 공지영 자신의 조사보다 상당 부분은 기존에 밝혀진 것들을 재조합 배열하고, 여기에 공지영의 생각과 감상이 덧붙여졌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의자놀이』를 읽는 다수의 독자는 누구일까. 하루 벌어 먹고 사는 하층 노동자가 『의자놀이』를 읽기는 힘들다. 중산층, 대학생, 지식인들이 『의자놀이』를 찾는 주요 독자층이다. 이들은 쌍용자동차 문제에 관심이 있지만 그렇다고 쌍용자동차 사건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는 못한다. 이것은 공지영이 쌍용자동차 문제를 잘 알지 못했던 초기적 모습과 닮아 있다. 결국 독자들은 자신과 같은 처지였던 공지영이 시간이 지날수록 쌍용자동차의 진실을 알아가는 내적 동일시를 텍스트의 독서 과정에서 체험했던 것이다. 『의자놀이』에서 등장하는 ‘1인칭 나’는 마치 소설의 독자가 주인공과 동일시되어 허구의 사건에 빠져들어가는 효과를 발산한다. 이것이 르뽀의 미흡함에도 불구하고 『의자놀이』가 지닌 중독성의 비밀이다. 공지영은 이 책을 통해 쌍용자동차 노동자에 대한 동정, 연민, 분노에서 더 나아가 신자유주의 체제와 한국자본주의 변혁을 촉구한다. ‘의자놀이’가 더 이상 놀이가 아니라 삶의 현실일 때, ‘의자놀이’는 치명적 핵폭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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