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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시론> 괄호의 미학

<문화 시론> 괄호의 미학
뒤샹의 <샘>과 김기택 시집『갈라진다 갈라진다』(문학과지성사, 2012)




   지배이데올로기는 대중에게 강조해 보여줄 미디오만을 '괄호'에 넣는다. 어떤 판단이든 '괄호'에 넣어진 것은 '괄호'에 안 넣은 것을 무시한다. 우상의 실체를 보려면 내부로부터 '괄호 벗기기'(unbracketing)를 해야 한다.

   알랭 바디우가 『비미학(非美學)』이라는 책을 낸 것은, 미학을 부정하고 제거하자는 말이 아니라, 본래 ‘괄호’ 안에 들어가 있는 미학의 ‘괄호’를 벗기고 재구성 하자는 것이다. 새로 ‘괄호’ 안에 넣고, 또 ‘괄호’를 벗겨 새로운 의미를 산출하자는 것이다.


1. 

   1917년에 있었던 뉴욕 앵데팡당(inde'pendant)전 출품작으로 R.MUTT란 가명의 인물이 출품한 작품은 남성용 변기였다. 변기회사 이름인 Mott Works라는 단어를 살짝 바꾼 이름의 제출자 R.MUTT라는 자가 내놓은 작품 ‘변기’의 작품제목은 <샘>이었다. 당시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작품이었다.

   뒤샹은 그해 앵데팡당전의 운영위원이었다. 뒤샹 이외의 운영위원들과 설치위원들은 이 작품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황당했다. 참가비 6달러만 내면 누구나 작품을 내걸수 있는 특별전시회였지만, 결국 운영위들은 이 작품을 전시장 칸막이 뒤에 놓기로 했다.

   뒤샹은 전시가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에게 반격했다. <샘>을 왜 전시하지 않았는지 주장하며 뒤샹은 미술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작가의 ‘선택’이라고 주장했다. 이 일은 ‘예술작품은 작가가 자신의 손으로 만든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전복시킨 사건이었다. 뒤샹은  그후 <샘>이 외에 자전거 바퀴나 옷걸이 등 원래 있는 사물을 전시했고, 이런 사물들에 대해 그는 '레디 메이드(ready made, 기성품)라는 이름을 붙였다.

   뒤샹이 미술전에 변기를 전시한 것은 새로운 예술을 “괄호에 넣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괄호 안에 들어갈 수 있다’는 선언이다. 만약 뛰어난 예술이라면 ‘괄호’ 안에 넣고 벗겨도 다른 해석을 허락할 것이다.

   벤야민은 복제시대에는 예술작품의 아우라가 사라진다고 말한다. 실은 그 반대로 복제시대에 그때까지의 예술작품에 아우라가 부여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까지 무관심의 대상이었던 앤디 워홀 같은 이의 복제품이 ‘괄호’에 넣어진 것이다.


2. 

   며칠전 김기택 시인이 신간『갈라진다 갈라진다』(문학과지성사, 2012)을 내셔서, 선배님의 밥을 얻어 먹었다. 내가 모셔야 하는데 얻어 먹었다. 대신 내가 좋아하는 코코브루니에 가서 차를 대접했다. 내가 방금 ‘대접’이라고 썼는데, 나에게 김기택 시인은 그런 존재다.

   다른 장르에 한눈 팔지 않고 시집만 여섯 권 내는 일은 쉽지 않다. 여섯 권이라는 숫자는 그의 집중력과 성실성을 증명하는 숫자다. 노동자 시인 최종천 형님과 더불어 내가 이 시대의 시인으로 존경하는 몇 안 되는 시인이다. 숙명여대에서 내 수업을 들었던 학생 중 시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은 졸업하기 전에 꼭 김기택 시인의 시창작론을 들으라고 권해 왔다. 그날 선배와 대화하다가 얻은 두 가지 말을 기록해두고 일해야겠다.

   “김 선생님이 일본에서 있는 동안 시 쓰기 어려웠을 꺼예요. 아무래도 외국에 있으면 좋은 시를 읽고 시에 질투를 느끼는 기회가 적지 않을까요?"

   나는 ‘시의 질투를 느낀다’는 문장에서 멈칫 했다. 바꾸어 말하면 김기택 시인은 좋은 시에 질투를 느끼며 더 탁월한 시를 쓰려고 집중해 왔다는 고백일 것이다. 그가 미학적 질투를 느낀 결과, 그가 즐겨 쓰는 수법은 ‘괄호의 미학’이 아닌가 싶다. 나는 김기택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뒤샹의 <샘>이 생각나곤 했다. 김 시인의 시 중 비교적 짧은 시를 읽어보자.  

 

 



     트럭 앞에 속도 하나가 구겨져 있다.
     부딪쳐 멈춰버린 순간에도 바퀴를 다해 달리며
     온몸으로 트럭에 붙은 차체를 밀고 있다.
     찌그러진 속도를 주름으로 밀며 달리고 있다.
     찢어지고 뭉개진 철판을 밀며
     모래알처럼 사방으로 흩어지는 유리창을 밀며
     튕겨나가는 타이어를 밀며
     앞으로 앞으로만 달리고 있다.
     겹겹이 우그러진 철판을 더 우그러뜨리며 달리고 있다.
     아직 다 달리지 못한 속도
     쪼그라든 차체를 더 납작하게 압축시키며 달리고 있다.
     다 짓이겨졌는데도 여전히 남아 있는 속도가
     거의 없어진 차의 형체를 마저 지우며 달리고 있다.
     철판 덩어리만 남았는데도
     차체가 오그라들며 쥐어짠 검붉은 즙이 뚝뚝
     바닥에 떨어져 흥건하게 흐르는데도
     속도는 아직 제가 멈췄는지도 모르고 달리고 있다.


          ㅡ김기택,「고속도로・4」전문(밑줄은 인용자)


   김기택 시인의 특장을 잘 드러내 주는 시다.

   시의 첫행은 “트럭 앞에 속도 하나가 구겨져 있다”다. 이 시에 나오는 ‘속도’라는 단어를 ‘사람’ 혹은 ‘운전자’로 대체하면 어떨까. 그렇지만 시인은 끝까지 ‘속도’로 명기한다. 인간은 오직 속도와 다름없다. 시인이 주목하는 ‘괄호’ 안에는 오직 인간을 비인간화 시키는 ‘속도’만이 존재한다.

   김기택 시인은 한 장면을 ‘괄호’에 넣는다. 그리고 ‘괄호’ 안에 돋보기를 들이민다. ‘괄호’ 안을 치밀하고 끈질기게 투시하고 묵상하고 미시(微示)적으로 해체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괄호’를 벗겨내고, ‘괄호’ 안에 들어가지 못한 ‘무관심’의 입장에서도 ‘괄호’ 안을 판단한다. 그는 늘 ‘괄호’ 안의 비극적인 사건을 무관심의 거리에서 바라보아, 전혀 낯설게 만들어 버린다. 급한 낭만주의자라면 ‘괄호’ 안에서만 평가하려 할 것이다. 저 자동차에 탄 인간의 죽음을 비극적으로 묘사할 것이다. 김기택 시인은 ‘괄호’ 밖에서 ‘괄호’ 안을 무관심하게 전복시킨다. 시인의 ‘괄호’ 안에는 이미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고발한다. 인간의 대체물이 된 ‘속도’는 처절하게 붕괴되어도, “아직 제가 멈췄는지도 모르고 달리고 있다.”


3.
   “선배님 시 중에 지하철에 관한 시가 있어요. 그쵸?”

   “맞아요. 나는 지하철이나 카페에서 시를 쓰곤 해요. 골방에서 쓰면 시가 잘 안 돼요.”

   여기서도 멈칫 했다. 작가들 대부분은 골방에서 글을 써야 한다고 한다. 송경동은 거리나 광장에서 시를 쓴다. 나는 거리/연구실, 학교 교실/대중강의, 고급문체/홈리스 문체의 ‘사이’에서 글을 쓰려 했다.

   김기택 선배는 지하철이나 카페에서 시를 쓰고, 컴퓨터로 교정 보기보다는 프린트 해서, 원고 교정 보듯이 본다고 한다.

   김기택 시인은 철저하게 대상에 거리를 두며 시를 쓰는 성실한 문사다. 그의 창작 미학 중의 한 방법은 괄호에 넣고 빼기다. 위에 인용한 시에서 ‘속도’를 비판했듯이, 그는 느린 삶을 살고 있나보다.

   지배이데올로기는 대중에게 강조해 보여줄 미디오만을 ‘괄호’에 넣는다. 어떤 판단이든 ‘괄호’에 넣어진 것은 ‘괄호’에 안 넣은 것을 무시한다. 그렇지만 뒤샹과 김기택 시인은 ‘괄호’ 안을 의심하고, ‘괄호’에 들어가지 않아 주목되지 않는 ‘비인간화’를 오히려 괄호에 넣는다. 그래서 우상의 실체를 보려고 내부로부터 고정관념을 ‘괄호 벗기기’(unbracketing) 한다.

   김 선배 시집을 연구실에 들어와 읽기 시작한다. 그리고 첫페이지에 써있는 <시인의 말>을 읽어 본다. 대단한 자신감이다. 부럽다. 저 ‘괄호의 미학’에 질투해야겠다.  


     "죄송하지만 또 시집을 낸다. 시 쓰는 일 말고는
     달리 취미도 재주도 할 일도 없는 내 뛰어난
     무능력과 활발한 지루함과 앞뒤 못 가리는
     성실함 탓이다."

          ㅡ2012년 10월 김기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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