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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비평

분석가의 공포(손종업 평론집/ 도서출판 경진 발행)



돛대에 몸을 묶고 사이렌의 노래를 듣는

율리시즈의 부릅뜬 두 눈은, 고통과 희열에 벌어진 입은, 말한다.

들어라, 가능한 한, 귀 기울여 들어라.

그러나 빠져들지는 말라.



1. 지은이 소개

손종업

1963년 충남 논산 출생. 한때 간절히 시인이 되길 꿈꾸었으나 시인으로서의 생이 두려웠다. 1995년에 경춘선 타고 춘천을 오가면서 썼던 오정희에 관한 글 '갇힌 불꽃의 몽상과 신화적 공간의 열림'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평론가의 길에 들어섰다. 2000년에 <극장과 숲>(월인)과 <전후의 상징체계>(이회)라는 연구서를 내고, 다음 해에 첫 번째 평론집 <문학의 저항>을 출간했으나 너무 서둘러 낸 탓에 부실했다. 늘 분서에의 욕망에 시달렸다. 이번에도 그러지 않을까. 언젠가부터 지지부진한 문비연 회원이다. 2002년부터 선문대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 책 소개

사이렌에 대항한 율리시즈(오디세우스)의 영웅담은 유명하다. 율리시즈는 사이렌의 노랫소리에 대항하기 위하여 선원들에게는 솜으로 귀를 막고, 자신은 돛대에 몸을 묶은 채 그녀의 노래를 듣고도 유혹을 이겨내어 위기를 넘긴다. 여기서 율리시즈는 비평가에 비유된다. "그런 의미에서 율리시즈는 또한 분석가들의 아버지가 아닐 것인가. 그는 말한다. '들어라, 가능한 한, 많이, 귀 기울여 들어라. 그러나 빠져들지는 말라'고"(28쪽). 비평가는 문학이라는 허상에 귀를 막으면 안 된다. 하지만 그 환상에 빠져들어서도 안 된다. 기둥에 몸을 묶고, 돌아가야 할 이타카를 꿈꾸며, 사이렌의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이렌이 부르는 노래의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율리시즈가 묶인 기둥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것은 시대마다, 비평가마다 조금씩은 달리 해석되어 왔다. 저자는 여기서 윤지관을 언급한다. 민족문학이라는 거대한 기둥에 묶여 오직 이타카만을 향한 그의 비평을 언급한다. 하지만 그런 일관된 이상으로 사이렌의 허상과 싸우며 도착하게 될 이타카는 비평가에게 무엇인가. 모든 텍스트가 파헤쳐져 그 실체를 드러낸 이상이 기다리는 꿈의 도시인가. "알고 보면 '이타카'는 또 하나의 도시일 따름이다. 만일 거기에 의미가 있다면, 사이렌의 노래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이르렀다는 사실이 아닐까? 그렇다면 비평가여, 들어라, 저 낯설고 불길한 1990년대 이후의 노래를"(33쪽). 현대문학에서 "신경숙과 배수아, 박민규와 김애란 등에서 리얼리즘은 갱신되어야 한다. 또한, 소설가 전성태가 마주한 '한계선'에 대해서 우리는 더 많이 이야기를 해야 한다. 즉, 한 젊고 성실한 작가의 글쓰기를 민족문학이라는 해묵은 주형 속에 더 이상 가두어놓을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34쪽).


3. 차례

제1부 사이렌의 노래를 듣다
분석가의 공포: 윤지관론
<요코 이야기>가 불편한 몇 가지 이유
바리의 귀환
시스템의 내부와 외부-시티즌과 승려: :정이현의 <달콤한 나의 도시>와 박주영의 <백수생활백서>
검은 눈동자: 신경숙의 <리진> 읽기
삶을 완성하는 것은 결국 죽음이다: 박완서의 <친절한 복희씨> 읽기
갇힌 물의 노래를 들어라: 우리 문학 속의 물

제2부 소설이라는 미완의 모험
장편소설이라는 미완의 모험
탈문체의 시대를 떠도는 문학의 유령: 젊은 작가들의 소설언어와 시대의식
소설의 은하계를 여행하는 에세이스트를 위한 안내서: 우리 소설의 에세이적 경향에 대하여
그를 따라가라: 1990년대 문학과 환상성

제3부 떠도는 수사들
책들의 책: 포스트모던 시대의 복제소설
거울 속의 유령작가와 역사소설의 미궁: 김연수론
우리 문학 속의 트로이목마: 박민규에 관한 열세 개의 단상
떠도는 수사들: 배수아론
녹슨 못과 검은 수련: <검은 설탕이 녹는 동안>에서 <물의 정거장>까지
모형 카나리아의 울음: 김숨론
늙은 거미의 우울: 이 시대 소설가의 운명에 관한 단상

제4부 공원으로의 잔인한 산책
미성년의 사상: 기형도론
보여주는 시와 보이지 않는 세계: 어느 시인의 투쟁과 시의 운명
시인으로서의 生
푸른 말을 찾아서
어느 노동자 시인의 시와 죽음: 박영근의 시와 삶
시공원의 묘비명들: 이성복 시집 <아, 입이 없는 것들>
 

4. 책 속으로

하지만 만일 비평가가 추구하는 객관성이 율리시즈를 묶은 기둥 같은 것이라면, 비평가로서 그는 동시에 사이렌의 노래에 홀린 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날 비평은 자신이 떠도는 텍스트 속에서 어떠한 의미도 발견하지 못하는 맹목이기 쉽다. 많은 비평가들은 '언어의 감옥'에 갇힌 채―물론 비평가 자신은 전혀 이 갇혀 버림을 인식하지 못하기 일쑤다―알아듣기 어려운 헛소리들을 지껄이거나, 달콤한 말로 작가와 작품의 뒤에 숨어 있는 상인들에게 아첨하거나, 스스로 사이렌이 되어 독자들을 현혹할 따름이다. 비평은 그렇게 잊혀지고 있다. 하긴, 노르베르트 볼츠가 말하듯이 우리 문명이 '구텐베르크-은하계(활자문화)'의 끝에 서 있다면, 다만 비평의 죽음이 문학의 죽음보다 조금 일찍 찾아온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또한 문학의 죽음조차가 어떤 문화의 전적인 부재라기보다는 그 변형 또는 진화를 의미하는 것일 테니, 비탄에 젖을 일만은 아닐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이 시대에, 그가 누구든 비평가라면 사이렌의 노래를 듣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제 나는 다시 한 번 모리스 블랑쇼의 <미래의 책> 서두에 자리잡고 있는 율리시즈의 항해를 떠올린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계몽의 변증법>의 저자들이 이 이야기로부터 문명 자체의 흐름을 간취해냈다면, 모리스 블랑쇼는 여기에서 소설의 탄생을 읽어냈다. 율리시즈는 길을 잃었고 오래 방황하지만, 그러나 언젠가 목적지에 도달할 거라는 희망조차 상실한 것은 아니다. 모험이 시작되기도 전에 예언자 키르케는 이미 그에게 말한다. "이것을 주의 깊게 들어라. 그러면 신이 너의 정신을 무장시킬 것이다." 사정이 이러할진대, 이타카는 사이렌의 노래와는 상관없이 저 멀리에 외따로 존재하는 성소일 수 없으리라. 우리는 '헛것'이 출몰하는 이유를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안 된다.

- 18~19쪽

그래도 어느 정도는 '부자되세요'가 대표적인 인사가 되어 버린 이 타락한 공화국의 시민들에게 부치는 한 인문학자의 편지였으면 합니다. 천박한 실용주의는 '그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 안에 있습니다. 해롤드 블룸에 의하면 문학은 '다른 것으로 존재하려는 열망,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대한 숭고한 동경'과 관련됩니다. 특별히 기계들이 만들어내는 허위의 창문들Windows에 사로잡혀 있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문학의 죽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이미 죽은 것에 대한 조문이 아니라 너무 서둘러 매장된 것들을 되살려내려는 시도이기도 합니다. 그렇지요. 문학이 아니라 문학을 통해 우리가 꾸었던 꿈의 상실이 문제일 것입니다. 그 꿈을 찾아 헤매는 이 시대 작가들의 모험담과 좌절 심지어는 죽음 속에서 저는 율리시즈를, 바리데기를, 오르페우스를 보았습니다. 저도 '그것'을 가지고 나오고 싶었습니다. 조금 어렵게 여겨지는 부분들이 도처에 남아 있습니다. 돌파하든, 우회하든, 그것은 전적으로 여러분의 자유일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 읽든, 끝까지 가주셨으면 하는 게 제 바람입니다.

- 「책머리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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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분석가의 공포

지은이: 손종업

ISBN  978-89-5996-065-1 93810

신국판 / 468면 / 값 1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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