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게 고단한 당신, 당신의 꿈은 아직 안녕한가요?
옛 속담에 콩 심은 곳에 콩 나고 팥 심은 곳에 팥 난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 창작집에 실린 9편의 소설작품에서 저자는 위 말을 현대적으로 역설해 말하고 있다.
“금수저한테서 금수저 나오고, 흙수저한테서 흙수저 나온다”라고.
가슴 아프고 화나고, 요즘 시대에 인생유전이라는 게 말이 되냐며 부정하고 싶지만, 이게 바로 우리가 처한 리얼한 현실이다.
조선시대의 신분제도가 사라진 지 100년도 훨씬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에서는 신(新) 카스트문화가 눈에 보이지 않게 작용한다. 학벌에 따라, 직업 및 경제력에 따라, 출신지와 거주지에 따라, 자기 자신이 아닌 부모의 직업과 집안환경에 따라 묘하게 계급화되어 인생의 희비가 엇갈린다. 작품들을 통해서 저자는 고작 이런 외적인 것들로 한 인간을 ‘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못난이’라고 쉽게 치부하고 낙인찍어버리는 이 편협한 시대와 사회를 리얼하고도 통렬하게 꼬집고 있다.
그래서 여기에 수록된 9편의 작품들은 자기를 부정하고 외면하는 사회의 틈바구니 안에서 더 이상 살아갈 가치나 의미마저도 부여받지 못한 채 ‘소외’의 두꺼운 껍질 안에 몸을 웅크린 채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 시대의 수많은 달팽이들의 고단하고 눈물겨운 항변이다.
쪽방에서 독거사로 생을 끝마친 전직 톱스타가 그렇고, 공무원시험에 매년 낙방하는 시간제 아르바이트생이 그렇고, 성적으로 학대당하며 가족생계를 책임지는 정신지체 장애인이 그렇고, 해체된 가정으로 인해 맨몸으로 내동댕이쳐진 딸들이 그렇고, 고엽제의 후유증으로 말미암아 폐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베트남전쟁 파병군인 부자(夫子)가 그렇고, 배우를 꿈꾸지만 고작 속옷 전단지 모델밖에 할 수 없는 미혼모가 그렇고, 코리안 드림의 헛된 실체를 봐버린 조선족 여인이 그렇다.
우리는 그들의 비명 소리를 듣지 못한다. 아니, 듣고서도 귀를 막고 시치미를 뗀다. 그래서 그들은 절망과 좌절에 몸부림치며 스스로를 물어뜯거나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다.
더 나아지거나 기대할 수 없는 삶, 통로와 출구가 없는 삶, 바람 한 점,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삶! 겉으로는 시시콜콜한 로맨스와 일상적인 이야기 같아 보이지만, 그 이야기의 내면 깊숙이 걸어 들어가면 이 창작집 속 작품들은 그런 고단한 삶을 항변하고 있다.
저자는 작품을 통해 묻고 있다. 자신의 꿈을 잊은 채로 고단한 일상에 찌든 채 그저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가는 것에 어느새 익숙해진 당신, 당신의 꿈은 아직 현재진행형인가? 당신의 꿈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기조차 힘든 게 되었다면, 오늘 그 꿈을 다시 기억해 되새기길 바란다고. 꿈조차 잃어버린 인생은 너무나 허망하고 메마르고, 안쓰럽기 때문이다.
■추천사■
그리움을 글로 쓰는 작가
작가는 그리움이 많은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홍지화 작가는 천생 ‘작가’이다. 글쓰기가 ‘구원’이고 ‘숙명’인바, 얼마나 많은 순간 그는 내적으로 상승과 추락을 거듭해왔겠는가. 여기 실린 작품들은 뱀처럼 온몸을 땅에 대고 낮은 포복으로 통과한 작가의 치열하고 눈물겨운 기록이라 할 만하다. 그가 지나온, 지나가야 할 땅은 현실적 고통에 따른 눈물과 그리움의 심지를 겨냥한 에로스 사이의 어두운 골짜기다. 작가 스스로 ‘글쓰기란 일종의 십자가’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단지 자신의 삶을 짊어져간다는 의미의 협소한 ‘십자가’가 아니라, 작가가 그려낸 인물들의 소외와 상처까지 기꺼이 함께 짊어져 가려는 자기헌신의 ‘십자가’일 것이다. 문학판조차 자본주의적 메커니즘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회자되고 있는 이런 시대에, 문학을 구원이라고 여기고 그 상처투성이 전사의 길을 오롯이 가고자 하는 작가 홍지화의 진정성이 경이롭다. (박범신 작가)
■책 속으로■
나는 한동안 모든 기능이 정지되어 있었던 몸 안으로 이윽고 산소가 들어오고 피가 구석구석 도는 것 같은 명료한 기분이 든다.
…
이름 모를 작은 꽃이 핀 화분을 하나 사들고 아파트 현관에 들어서자, 마침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던 옆집 여자가 왜 그리 자주 인테리어 공사를 하느냐며 말을 건넨다.
“하루에 수천 번도 더 갈아치우고 싶은 남편 갈아치울 수 없고, 내 맘대로 안 되는 자식도 갈아치울 수 없으니 만만한 인테리어 갈아치우는 걸로 대신하는 거죠 뭐.”
―<왕년의 한 스타의 죽음> 중에서
민재는 말없이 전화를 끊었다. 피가 거꾸로 끓는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이제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우리 할머니는 병원비가 없어서 죽어가고 있는데, 그런 사정을 빤히 아는 사장은 내 월급을 3개월치나 떼먹고 팔자 좋게 해외여행 중이라고?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참을 필요가 더는 없었다. 이대로 더 참는다는 건 할머니에 대한, 그리고 나름 최선을 다해 착하게 살았노라 자부하는 제 인생에 대한 모독인 것만 같았다.
―<드라이아이스> 중에서
그날 저녁, 엄마는 나한테 바보등신 같은 년이라며 핏대를 세웠다. 네 팔자가 뭐가 되려고 그러냐고. 엄마는 나대신 분해하며 울고 있었다. 나는 그런 엄마가 보기 싫어 내 방으로 건너가면서 들릴 듯 말 듯 낮은 음성으로 한마디 툭 던졌다. 엄마 닮아서 그래.
―<바빌로니아 연가> 중에서
그러던 어느 날, 영숙 엄마는 한 동네 여자한테서 제법 귀에 솔깃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웃동네에서 족발집을 하는 사내가 재혼할 젊은 처녀를 찾고 있다는 것. 첫째도 둘째도 자기 말에 순종하고 착하면 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마침 막내의 고등학교 등록금이 필요했던 영숙 엄마는 이제 고작 열일곱 살인 딸을 애가 줄줄이 딸린 홀아비의 후처로 내준다는 게 기막힐 노릇이었지만, 그것 말고는 다른 길이 보이지 않았다.
“영숙아, 그 집에 시집가믄 니가 환장하는 되아지괴기 마니 묵을 수 있을겨.”
“참말이여, 엄니? 막 먹어도 되는겨? 나 배 터지게 먹어야 쓰갔다. 엄니도 같이 가. 막내 너도.”
“신랑이 하라는 대로 햐. 신랑 말 안 듣고 울고 그라믄 못써. 장 서방 좋은 사람이라니께.”
“야, 엄니. 나 신랑 말 진짜 진짜 잘 들을거구만.”
첫 남편의 집으로 떠나기 전날 밤, 영숙 엄마는 천진난만하게 잠든 영숙의 손을 꼭 쥔 채 눈물만 하염없이 흘렸다. 딸아,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영숙이가 돌아왔다> 중에서
그가 유독 사랑했던 고흐는 고갱과의 언쟁에서 지자, 배신감을 느껴 자신의 한쪽 귀를 잘라 신문지에 돌돌 말아서 고갱에게 선물로 보냈다는데, 그렇다면 나는 내 신체부위 중 어떤 것을 잘라 프랑스에 있는 그에게 국제택배로 보내야 할까? 고흐처럼 귀? 아니면 그가 유일하게 좋아하던 내 신체부위인 적당히 도톰하면서도 도드라진 입술? 아니면 그가 스킨십에서 늘 불만족해 했던 그리 풍만하지도 않은 젖가슴? 그것도 아니라면 그 모든 것을 조합하여 하나의 엽기적인 오브제로 만들어 보내는 건 어떨까.
―<사마귀, 그녀의 사랑법> 중에서
나는 그동안 몇몇 남자와의 관계를 통해 정신적으로는 너덜너덜해졌을 지도 모르지만 물리적으로는 흠 하나 없는 깨끗한 육체를 가지고 있다. 물론 나는 동정예찬론자는 아니다. 순결? 그 딴 것은 그저 허상에, 남자들 중심의 이데올로기가 조작하고 부풀린 아프리카의 할례처럼 잔인하고 악질적인 핏빛 제물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나의 그것은 미래의 내 사람을 위해 준비해둔 최후의 만찬이다. 나를 성공이라는 날개로 자유롭게 날아오르게 해줄 수 있는 사람, 별 볼 일 없이 하찮은 누더기나 걸치고 있는 나를 신데렐라로 만들어 이 세상의 맨 꼭대기로 에스코트해줄 사람, 바로 그를 위해 마련해 둔, 그와 함께할 축배인 것이다. 그러나 오상운, 그는 아니다. 그저 평균치의 인물밖에 되지 못하는 그가 나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고작 옷 몇 벌과 밥 몇 끼일 뿐이다.
―<바람의 패러글라이딩> 중에서
아버지는 어느새 울고 있었다. 뻘겋게 핏발이 선 아버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나는 그 눈을 차마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어서 외면했다. 누구에게나 사는 건 여전히 쉽지 않은 문제이고, 육십 평생을 살아온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버지…
하지만 나를 비롯해 어느 누구도 입을 떼지 않았다. 어머니는 또 걸레를 손에 쥐고 방을 훔쳤다. 마치 당신이 할 일은 그것뿐이라는 듯이.
아버지는 등을 돌린 채 담배를 피웠다. 마치 당신 또한 할 일이라고는 오로지 그것뿐이라는 듯이.
―<내 거울 속 달팽이> 중에서
두 평 남짓한 이 방에 지혜와 함께 있으면 은수는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에 제 목소리마저 빼앗기고 말 것 같다는 왠지 모를 강박감까지 들어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하고 귀담아 듣지도 않을 라디오를 하루 종일 켜두기도 했다. 무덤 속 같은 이 방에 하루 종일 혼자 틀어 박혀 있는 아이를 위해, 제법 보호자 다운 생각에서 집주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양이를 키우고 있지만, 고양이 역시 방을 잠식한 침묵의 바이러스에 그새 감염이라도 됐는지 요즘은 도통 볕 잘 드는 아랫목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만 있어 제 구실을 못한다.
―<로즈타투(Rose Tattoo)> 중에서
칸은 네팔에서 국립대학을 다니다가 학비도 넉넉히 벌고 기술도 배워갈 겸 겸사겸사 한국에 왔다고 했다. 그 역시 코리언드림의 부푼 꿈을 가슴 가득 품고 그렇게 고국을 홀홀히 떠나왔던 것이다. 남과 북이 갈라져 지구본에서 찾아보면 새끼손가락의 한 마디보다도 더 작은 땅 코리언은 언제부터인가 외국인들의 머릿속에서 부자나라, 잘사는 나라로 자리 잡아갔다. 미국이나 일본만큼 잘사는 나라로. 그래서 그들도 꿈을 좇아 허위허위 이곳까지 왔던 것이다.
―<유랑(流浪)의 도시> 중에서
■목차■
머리말
추천사
왕년의 한 스타의 죽음
드라이아이스
바빌로니아 연가
영숙이가 돌아왔다
사마귀, 그녀의 사랑법
바람의 패러글라이딩
내 거울 속 달팽이
로즈타투(Rose Tattoo)
유랑(流浪)의 도시
■지은이■ 홍지화
전북 익산 출신.
원광대학교와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문예창작학을 전공했으며, 한국 소설가협회와 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이십대 초반에 열정 하나로 집필한 장편소설이 문예지에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으며 대학교 재학시절 <고려대문학상>을 수상했다. 이후 <원광 젊은 작가상>과 <천강문학상> 등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첫 장편소설인 ≪첫사랑≫과 ≪사랑꽃≫, 인문에세이 ≪거장들의 스캔들≫(2012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이 있다.
현재 소설가로 활발하게 활동 중이며 전업작가로서 여러 매체에 다양한 글을 기고하고 있다. 뿌리가 넓고도 깊게 뻗은 울창한 아름드리나무처럼, 훌륭하고 대단한 작가라는 수식어를 달기보다는 늘 한결같은 작가로서 독자들의 눈물과 상처를 보듬어주고 위로하는 진정성 가득한 이야기꾼으로 끝까지 남고 싶다.
■ 도서명: 드라이아이스
■ 지은이: 홍지화
■ 펴낸곳: 작가와비평
■ 국판(148×210)/436쪽/값 13,800원
■ 발행일: 2015년 10월 30일
■ ISBN: 979-11-5592-165-4 03810
■ 분야: 문학>단편소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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