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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시인의 잡담(박세현 산문집, 작가와비평 발행)

가끔, 나는 내가 살아있다고 생각한다. 

쓸쓸한 오해와 착각.


한시절의 들숨과 날숨이 여기 다 모여 산다. 

심심해서 그리고 손이 굳을까봐 해 본 타자다. 


먼 훗날, 언젠가 (지금이 그날이지만) 

이 책을 펼쳐놓고 나는 물을 것이다. 


당신은 누구였던가? 


―<자서> 중에서



시에 관한 단상과 산문과 시가 뒤섞인 비빔밥 같은 책이 등장했다


≪시인의 잡담≫은 1983년 제1회 문예중앙신인상으로 등단, ≪헌정≫을 비롯한 여덟 권의 시집과 산문집 ≪설렘≫을 가지고 있는 중견 시인의 두 번째 산문집이다. 이 책은 아포리즘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저자는 산문집으로 호명한다. 아포리즘이 보여 주는 결정론적 판단을 사양하고자 저자는 굳이 산문집이라는 장르명을 선택했고, 산문의 한자어 산이 흩어졌다는 뜻을 가졌다는 의미에서 이 책의 중심과 더 호응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시에 관한 정신적 발열(發熱)을 응집했다는 점에서 너무 뜨겁거나 너무 차가운 책이다.

≪시인의 잡담≫(작가와비평)은 기본적으로 ‘시에 관한 잡담’이다. 그리고 시인에 관한 잡담집이다. 시는 무엇인가가 아니라, 무엇이 시인가에 대한 잡담이다. 잡담의 뜻이 그러하듯이 시에 관해서 정색하지 않고 떠들어대는 너절하고 쓸데없는 헛소리가 이 책을 가로지르고 있는 본색이다. 자신의 블로그에 ‘한 줄의 페허’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조각글들을 책이라는 공예품으로 재가공했다. 짤막한 조각언어들이 책의 몸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기왕의 산문집과 비슷하지 않다. 그 점은 이 책의 특징적이고 논쟁적인 대목이다. 산문이지만 반 정도 산문이고 반은 산문을 배신하는 산문이다. 산문이면서 시적 호흡과 리듬을 유지하는 글이다. 정색하지 않고 시와 시의 근처를 대놓고 잡담하고 있는 것도 한 특징이다. 저자는 시를, 시만 겨냥하고 있다. 즉, 시가 독서의 중심에서 멀어진 현실 속에서, 그걸 잘 알면서, 그렇더라도, 시를 쓴다는 것의 의미를 통렬하게 숙고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시를 재정의한다. 현실이라는 흔들리는 배 위에서 방향 없이 날아오르는 새를 겨냥하는 포수는 일정한 사냥 규칙을 신용하지 않는다. 정의되지 않는 것이 시라는 것의 속성이라는 전제 속에서 시적 결핍과 갈증을 끊임없이 현재화하려고 애쓰는 것이 이 책의 고달픈 프로세스다.

산문집이면서 책 속에 시인의 미발표 시가 수록되어 있음도 눈길을 끈다. 산문 속에 시가 있다기보다, 시와 잡담이 서로 조응하고 있다. 시집 속에서 시를 읽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울림을 만들어 내고 있음도 색다르다.

산문집 ≪시인의 잡담≫은 결국, 주변부로 밀려난 시에 대한 뜨거운 향수이자, 망해 버린 시의 운명에 대한 재호명이다. 시는 망했지만 모른 척 하고 시를 쓸 수밖에 없는 증상을 가진 이들을 위한 동병상련의 민간요법을 담아낸 희귀한 책이다.



가슴 더울 때


밤의 가장자리를 아꼈듯이 

내가 사랑한 것은 당신이 아니라 

누군가의 화사한 그늘이었다 

연필로 쓰고 지워버린 글씨처럼 

당신과 나는 손 닿지 않는 연습이었다 

손을 내밀어다오 

그 위에 마음을 얹어주겠노라 

다짐한 밤들이 다 지나갔다 

12월이다 밤의 중앙고속도로 

안동 방면으로 경차가 숨차게 달려간 뒤 

엔진의 잡음만 남아 웅웅거린다 

사랑하라, 가슴 더울 때 





■책 속으로■


무심코 눌린 건반이 자아내는 잔상들

추억이 있는 한 당신은 나의 남자요


과거는 원음대로 재생되는 것이 아니고 

반음 높거나 반음 낮게 울려오는 도착적 음원이다. 

그래서 당신은 마음 놓고 남 몰래 회상이라는 건반을 누를 수 있다. 


우리는 피치 못하게, 아니라고 할 수 없이, 미필적 고의로 남의 건반을 누르고 있거나 복면한 누군가에 의해 나의 건반은 눌려져서 질식 지경이다.  

―<정신의 방위병> 중에서



고전은 누구나 읽어야 할 권위를 지닌 책이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다. 어떤 외국 소설가는 이렇게 말했다. 고전은 ‘지금 읽고 있는’ 책이 아니라, 언제나 ‘지금 다시 읽고’ 있는 책이라고. 파우스트를 지금 읽는다고 하면 교양을 의심받을 수 있기에 ‘다시’ 읽는다고 퉁친다. 사랑스런 위선이다. 모든 책은, 영화는, 그림은, 심지어 삶조차 ‘다시 읽혀야’ 할 무엇이다. 처음 읽으면서 다시 읽는다고 하는 것은 유치한 앞가림이지만, 들었어도, 읽었어도 그 속에서는 다른 울림이 튀어나오지 않던가. 낯익지만 낯선 이 순간.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중에서



마치 그대의 동의를 얻기 직전까지의 번뇌와 망설임과 괄호 안에 가둔 희열의 순간이 사랑을 생성시켜 주는 것처럼. 

나에게 시는 강력한 현실이자 더없는 환상이다. 아무 것도 아니면서 그것 없이는 살아도 살아지지 않는 그 무엇이다. 그러니, 시는 언제나 나의 문제가 된다. 내가 누군지 모르면서 살고 있는 그 ‘나’의 문제일 뿐이다. 

시가 사회의 공공재라고 인식되기도 하지만 더 솔직하게는 주인 없는 사유재산임을 나는 더 지지한다. 그렇게 믿고 산다. 나의 우울증은 나의 시, 한국시, 문단의 소셜네트워크가 잘 돌아가지 않는 데 있지 않다. 

문학상을 돌려가며 탄다는 귀여운 질투가 가미된 소문에도 있지 않다. 계 타듯이 돌아가면서 타야지 한 사람만 계속 타면 더 큰 문제가 된다. 다시 말하지만, 나의 우울증은 한국문학이라는 숲이 말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말라버릴까 봐 걱정하는 일이다. 젊은 날 파울 클레는 이렇게 썼다고 한다. 

듣자. ‘나는 울지 않기 위해 그린다.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이유다.’ 나도 그런가? 나는 지금 이렇게 묻고 있는 나에게 되묻고 있다. 돌아보니, 한국문학은 한 번도 문제 있었던 적이 없었다. 그것만이 한국문학의 숭고한 문제일 것이고, 포즈였다고 생각하면서, 밖에 비오는데 이런 잡담할 정신은 아니어서, 마침표를 당겨 찍는다. 

―<잡담들> 중에서



네이버에서 헤프다를 검색해 본 날이다

그 말이 동사였음을 알게 된 것은 소득이다


어디 시 잘 쓰는 여자 없냐고 물어오던 과객에게 답한다.

그대가 말하는 시가 뭔지 말해주면,

나도 입을 열겠다. 


모든 의미를 담고 있으면서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은 말.

그런 게 시라면, 나는 지지하겠다. 


내가 불가피하게 섬기며 사랑하는 말

어불성설 語不成說


11월의 끝날. 

11월은 순수문학이다. 

사유의 완전성에 값하는 달이다. 

신경증이 없다. 

―<시는 여자처럼 미완성 기획이다> 중에서



부처님 오신 전날이군. 

종교는 에, 또, 

거기 그렇게 살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개발한 택지 같은 거겠지. 

그래도, 대자대비하신 이여, 

오늘 하루는 자비심도 놓고 쉬시기를. 

 

폐경기 남자처럼 단독으로 서 있는 망루(望樓)

더는 바라볼 게 없는 그대의 인문학

여기에 그대의 서푼어치 외로움을 인용한다. 

강원도 춘천시 약사동 어디더라, 

이렇게 되겠지.

하여튼 어쨌거나. 

 

술, 

담배, 

커피, 

섹스, 

망상,

詩는 

자기 파괴에 이르는 완전식품 

―<지금 당신 속으로 누군가 들어가고 있다> 중에서



■목차■


1 우연에 바친다

2 지금 당신 속으로 누군가 들어가고 있다

3 찔레꽃 재해석 하는 밤

4 나에게는 왜 너가 있어야 하는가

5 헤어져도 관계는 남는다

5와 6사이 아홉 편의 시

가슴 더울 때/ 깊고, 강하고 부드럽게/ 오후 네 시/ 전재산/ 누드/ 신림에서 돌아오며/ 철학자들/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웃고 있네/ 당신은 모르실거다/ 나는 좌파 인터내셔널/ 초가을 개심사/ 나는 웃고 있네(속편)/ 철학 한 잔/ 개운사/ 가을저녁의 시

6 시는 여자처럼 미완성 기획이다

7 잘못 걸려온 전화에 감사할 것

8 정신의 방위병

9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10 잡담들

잡담/ 누가 나를 찾는다/ 김수영식 앙케이트/ 내 안의 국경/ 서촌방향/ 편견의 계보학/ 자작 인터뷰/ 혼자 추는 이인무



■지은이■ 박세현


1953년생

시집 여덟 권

기타 등등



■ 도서명: 시인의 잡담

■ 지은이: 박세현

■ 펴낸곳: 작가와비평

■ 46판 변형(134×189)/316쪽/값 12,000원

■ 발행일: 2015년 05월 30일

■ ISBN: 979-11-5592-146-3 03810

■ 분야: 문학>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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