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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교양

우청우탁(寓淸于濁) (인문학 수프 시리즈 4: 문식)

우리 각자의 실천적 글쓰기, ‘문학’
실체 있는 문학 이야기

 

 

『우청우탁(寓淸于濁)』(문식)은 『장졸우교』(소설), 『용회이명』(영화), 『이굴위신』(고전)에 이은 인문학 수프 시리즈의 네 번째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문학이 ‘관념적’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그러나 문학은 관념이 아니다. 문학은 우리 각자의 실천적 글쓰기이며, 삶의 현장에서 각고의 노력 끝에 만들어지는 피와 땀의 결실이다. 『우청우탁(寓淸于濁)』은 이러한 ‘실체 있는 문학 이야기’이다. 문학이야기에 ‘문식’이라는 제목을 단 것은 ‘읽고 쓰는 일’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인간을 구원하는 최초, 최후의 수단. ‘문학’

 

문학을 아무 생각없이 한 번 읽고 말았다면, 그것은 문학을 ‘제대로’ 읽은 것이 아니다. 문학을 접하고 이에 대해 여러 번 곱씹어 볼 때, 그 문학은 진정 자신의 것이 된다. 『우청우탁』은 문학 작품은 물론, 개인의 문학 행위에 대해 이야기한다. 단, 기존의 문학 이론서와 같이 딱딱하게 이야기 하지 않는다. 『우청우탁』은 문학 이론에 저자의 경험을 더하여 쉽고 재밌는 문학 강의 같다.
우리는 저자의 이야기를 듣고, 개인의 문학 행위가 결국 우리 곁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깨닫고, 이를 바탕으로 문학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 문학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를 마치게 되는 것이다. 문학은 예나 지금이나 인간을 구원하는 최초, 최후의 수단이라고 한다. 빠르게 변하지만, 감정적으로 건조한 우리 생활에 문학은 필요 불가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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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저자의 말

 

아직 교실 못 찾았니: 소단적치인
미쳐야 쓴다: 하이퍼그라피아
넘치는 것들: 정신분석과 기호학
관계 혹은 보이지 않는 것들: 구조주의
욕망의 허구성: 삼각형의 욕망
보여주는 것들: 이미지 시대의 소설
걸으면서 빛나는 여자: 그라디바
환상의 가치: 해피엔드
비유를 몰아내는 현실: 벌레들의 합창
사랑의 열병 혹은 중독의 힘: 소설의 규율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 에로티즘 미학
유쾌하지 않은 내 이야기: 성장소설
시도 때도 없이 눕는 것들: 초상지풍
참 좋은 울음터에서: 시와 장엄
희미한 옛 사랑의 추억: 인기지리무신
번지는 것들: 환유
빛나는 것들: 은유
내리는 것들: 이미지
아버지의 얼굴: 정체성 서사
유추의 힘: 표상성·정보·신화

 

부록: 독서의 본질과 독서 지도의 유의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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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진리는 그물로 건져 올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람처럼, 느낄 수 있지만 무형지물이거나 아니면 그물 그 자체가 진리일 때도 많습니다. 아무리 그물이 성기더라도, 그 올이 굵고 튼튼할 때 진리가 그물을 타고 올라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려울 것 없습니다. 윤리와 역사로 날줄과 씨줄을 삼는 튼튼한 그물을 지으면 됩니다. 그것만이 우리의 삶을 진리로 안내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 나머지는 모두 ‘음모론’에 불과합니다. 촘촘한 그물망에 대한 턱없는 믿음,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맹신은 그 이름이 무엇이든 항상 궁극적인 진리와 가까이 있지 않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생각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언제나 불완전합니다. 인간의 생각이 바뀌면 그들이 만들어낸 것들도 따라서 바뀝니다. 생각을 넘어서는 힘, 그게 바로 진실입니다. 그래서 예술의 진실은 묘사에 있습니다. 구조주의가 끝내 밝히지 못하는 것도 바로 그 묘사의 힘, 예술의 위력인 것입니다.

―<관계 혹은 보이지 않는 것들: 구조주의> 중에서


저 역시 연애를 달콤한 것만으로 여기지는 않습니다. 힘들 때가 더 많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나이 들어 생각해보니 헌신보다는 욕망이 늘 앞섰던 것 같습니다. 타자에의 몰입에 앞서 자기에의 탐닉이 늘 먼저였던 것 같습니다. 젊어서 참여했던(자의반 타의반) 모든 연애사업이 악전고투 일색이었다고 기억되는 것도 다 그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연히 안타까운 오해, 못난 이기심, 분별없는 변덕, 속악스런 타산 같은 것으로 점철되어 있는, ‘죄 많은 내 청춘’ 시리즈가 되고 말았습니다. 연전에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라는 말이 횡행한 적이 있습니다. 큰 문제에는 시원하게(?) 합의해놓고 세부적인 타협에서 한계(본색)를 드러내 결국 서로 등을 돌리게 되는 상황을 비유한 말입니다. 그 말을 듣고 보며 저는 젊은 날의 제 연애 사업을 떠올렸습니다. 그 말이 사용된 맥락과 관계없이 제게는 그 말이 저의 ‘죄 많은 청춘’을 질타하는 말로 들렸습니다. 그랬습니다. 디테일에 가서는 언제나 악마의 유혹에 시달렸습니다. 비교를 일삼았고 공연한 트집거리에 휘둘렸습니다. 오직 ‘질투는 나의 힘’이라고만 여겼습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젊어서의 사랑에는 반드시 그 ‘디테일의 악마’와 대적하기 위한 ‘싸움의 기술’이 필요하다는 걸 몰랐습니다. 자기를 일망타진하는 ‘싸움의 기술’을 끊임없이 연마해야 된다는 걸 몰랐습니다. 그런 자명한 사실도 모르고 연애를 그저 싸움판으로 몰고 갔습니다. 저의 연애는 천사와 악마가 하루씩 배역을 나누어서 공연하는 블랙코미디와 진배없었습니다. 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에서』를 보면 젊은 날의 제 연애를 연상시키는 ‘최악의 사랑’이라 할 수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랑의 열병 혹은 중독의 힘: 소설의 규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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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양선규
소설가. 창작집으로 『난세일기』, 『칼과 그림자』 등과 인문학 수프 시리즈 『장졸우교(藏拙于巧)』(소설), 『용회이명(用晦而明)』(영화), 『이굴위신(以屈爲伸)』(고전) 등이 있으며, 연구서로는 『한국현대소설의 무의식』, 『코드와 맥락으로 문학읽기』, 『풀어서 쓴 문학이야기』 등이 있다.
충북대학교 인문대학 교수를 거쳐 현재 대구교육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