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의 정치성에 흠뻑 빠지고 김지하라는 횃불에 넋을 잃은 1984년
1984년 역사소설이 주도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특히 <소설 손자병법>은 <인간시장> 이상의 인기를 끌면서 1위를 차지하는가 하면, <삼국지> <초한지> <오싱> 등도 순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역사소설이 인기를 끌었던 것은 사실인 듯싶다. 하지만 1984년 출판시장을 주도한 사람은 사실상 김지하다. 그의 이름 뒤에 따라붙는 시인이라는 호칭 속에는 시인만으로 환원해 볼 수 없는, 그의 깊고 넓은 문학적이고 미학적이며 사상적인 층위가 김지하를 단지 한 명의 시인으로 분류하기를 꺼리게 만들었다.
김지하는 1964년 대일 굴욕외고 반대투쟁에 가담하여 첫 옥고를 치른 이래, 1970년 <<사상계>>에 <오적>을 발표한 괘씸죄까지 더하여 이후 8년 간의 투옥, 사형구형 등 고초를 겪는 등 독재 권력에 맞서 자유의 증언을 계속해 온 양심적 행동가 김지하에 대한 관심이 폭발한 해이다.
베스트셀러의 순위만 봐도 김지하의 이름 하나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볼 수 있다. <밥>(산문집), <황토>(첫 시집), <대설 남(大設 南)>를 비롯하여 <마침내 시인이여>는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오르내렸다. 또한 <타는 목마름으로>는 판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학가 등에서 마스터 인쇄된 책으로 불티나게 팔려나가기도 했다.
김지하의 영향으로 인해 1980년대 후반은 완전 시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거리에서나 술집에서나 <타는 목마름으로>의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후 권력과 출판은 더욱 가열 찬 싸움을 벌이게 되는데, 결과적으로 김지하는 그런 운동의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1984년 베스트셀러]
1. 소설 손자병법(정비석/고려원)
2. 1984년(조지 오웰/문예출판사)
3. 지적인 여성을 위하여(김혜원)
4.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레오 버스카글리아/지문사)
5. 밥(김지하/분도출판사)
6. 자기로부터의 혁명(지두 크리슈나무르티)
7. 오싱(하시다 스가꼬/창작과비평사)
8. 파리대왕(윌리엄 골딩/동광출판사)
9. 마침내 시인이여(신경림 외)
10. 배짱으로 삽시다(이시형/집현전)
11. 자신있게 사는 여성(이시형/집현전)
12. 황토(김지하/풀빛)
13. 삼국지(박종화/어문각)
14. 인간시장(김홍신)
15. 초한지(김팔봉/어문각)
16. 대학별곡(김신/소설문학사)
17. 대설 남(大設 南)(김지하/창작과비평사)
18.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말은(삼일서적 편집부)
19. 한국인 당신은 누구인가(구로다 가쓰히로)
20.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이해인)
***소설가 정비석: 1954년 <자유부인>(1950년대 전후 허무주의를 상징하는 소설, 서울신문에 연재)으로 대중에게 강력한 인상을 남겼다. <자유부인>은 우리나라에 베스트셀러라는 말이 널리 쓰이게 만든 계기를 만들어 준 책이다.
***<소설 손자병법>: 소설가 정비석 님이 <손자병법>에 대한 20여 권의 해설서를 읽고 저술한 이 책은 1981년 한국경제신문에 연재됐던 것을 전 3권의 책으로 펴낸 것이다. 이 소설은 1997년 3월 고려원이 문을 닫을 때까지 300만 부나 판매되었다고 한다. 2002년에는 은행나무에서 개정 재출판되었는데 40만 부 이상이 판매되어 출판기획자들에게는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
***김지하: 우리는 이를 부를 때 감히 ‘민중시인’이라는 수식어를 앞에 붙인다. 시인이자 미학자이며 사상가이면서 사회운동가이자 혁명가이기도 했던 김지하.
***<밥>: “밥은 바로 생명이며, 생명은 또 밥이다.” “밥을 그 본성에 따라 공동체적으로 나누는 적극적 실천이 바로 생명의 본래 있는 그대로의 고향에로 모든 중생이 귀의하려 하는 선적(禪的) 지향이며 굿이며 후천개벽이라 부를 수 있다.” 이 책은 민중시인 김지하가 생명운동의 필요성을 외치는 살아 있는 이야기 모음집이다. 또한 1980년대 이후 김지하가 펼혀온 생명운동의 이론적 출발점이 된 책이다.
***황토: 1970년 12월 한얼문고에서 간행한 김지하 시인의 첫 시집 <황토>, 이 책은 유신시대의 반공법과 긴급조치에 의해 판매금지되어 구해 볼 수 없었다. 1984년 7월 출판운동의 한 구심점이었던 풀빛에서 ‘풀빛시선’ 1번으로 다시 출간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권력의 눈에 뛰자 이 역시 판매금지를 피할 수 없었다. (풀빛시선 5권은 1980년대를 뜨겁게 달궜던 박노해 시인의 <노동의 새벽>이다.)
***1984년에는 황석영의 대하소설 <장길산>을 비록하여, 김주영 대하소설 <객주>가 동시에 완간됐다. 문학적으로 매우 우수한 이 소설들은 비록 베스트셀러 순위에는 오르지는 못했지만 대중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또한 김원일의 <불의 제전>, 임철우의 <아버지의 땅>, 한승원의 <포구>, 최일남의 <누님의 겨울> 등 역사성이 높은 소설들이 출간돼 소설시장을 풍성하게 했다. 해방 후 아동문학의 최고 걸작 중 하나인 권정생의 <몽실 언니>가 탄생한 것도 바로 1984년이다.
***1984년 김지하를 시작으로 1985년 이해인 수녀, 이후 서정윤, 도종환으로 이어지는 시의 전성시대를 예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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